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히브리 격언이 있습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됩니다.
포도주도, 향수도 잘게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 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됩니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려면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부서짐의 size가 성숙의 size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는 도리개질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앞마당에 펼쳐 놓고 사정없이 도리개로 후려칩니다.
곡식들의 신음소리에도 왜, 나만 때려?
곡식들의 저항소리에도 이제, 그만 좀 때려?
농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참을 내려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아프라고 때림이 아닙니다.
미워서 때림도 아닙니다.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함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더 잘게 부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농부이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도리개질을 하실 때가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말이죠.
우리는 너무 아파 차마 소리도 못 냅니다.
"왜, 나만 때리느냐고" 불평도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워서야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도리개질은 쉬지 않습니다.
더 많이 부서지라 하심입니다.
더 많이 깨어지라 하심입니다.
더 많이 죽으라 하심입니다.
도리개질의 강도가 하나님 사랑의 깊이 입니다.
왜냐하면 부서져야 사용하시고 부서진만큼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일상적인 연장을 만들기 위하여
달구어진 쇠를 적당히 두들겨 댑니다.
그러나 특별하고 귀한 도구를 만들기 위하여 구슬땀을 흘려가며
한 나절은 두드리고 또 두들겨 댑니다.
대장장이의 두들김 소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 다시 오실 날에 알곡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때에 더 귀하게 쓰시려고.
우리의 신음소리에도 외면하신 채
두드리고, 내려치고, 밟고, 깨뜨리고, 상하게 하고,
거절당하게 하고, 실패케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억울하게 하고,
결국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십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하여 살고,
버림을 통하여 얻고,
부서짐을 통하여 알곡 되고,
깨어짐을 통하여 쓰임 받고,
포기함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하루만 죽어서도 안 됩니다.
한번만 죽어서도 안 됩니다.
한번만 깨어져서도 안 됩니다.
한번만 부서져서도 안 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부서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단한 이유는
우리의 고백이 "나는 날마다 사노라" 이기 때문입니다.
왜 불쑥 불쑥 혈기가 나나요?
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미움이 일어나나요?
왜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짜증으로 시달리나요?
왜 견딜 수 없는 답답함과 절망감으로 우울해지나요?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덜 깨어져서 그렇습니다.
덜 부서져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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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부서지게 하심은 쓰시기 위함이며
깨어지게 하심은 성숙하게 함이며
죽으라 하심은 살리시기 위함이며
비참하고 초라하게 하심은 그만큼
"내가 너를 사랑 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고목에서 꽃이 피고, 반석에서 샘물 터짐이 더 귀하고 아름답듯
우리의 부서짐과 깨어짐을 통하여 성숙해지고 쓰임 받을 때
더 없는 감동과 기쁨이 두 배겠지요.
어떤 때는 "하나님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만 좀 부수고 때리셔도 되지 않느냐고?
저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하심의 때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대우 하시고 사랑하신다" 하시면서
종종 발가벗겨 네거리에 서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게 하심은
똑바로 살게 하심입니다.
똑바로 걷게 하심입니다.
똑바로 보게 하심입니다.
똑바로 믿게 하심입니다.
오늘 그 사랑에 눈물겨워
그분 가슴에 살포시 얼굴을 묻고 고백합니다.
"이전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옮겨온글입니다.>
글을 읽어가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