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벤쿠버 사랑의교회 이은진목사님의 글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라’, ‘하지마라’는 명령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이런 명령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직접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이 내주하시면서 말씀하시고 조명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우리에게 보통 두 가지로 옵니다. 직관처럼 우리 마음속에 생각을 넣어주시거나 마음의 평안을 통해 확신을 줍니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고 싶은 소원을 주십니다. 그 소원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도 주십니다. 단, 우리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 할 때입니다. 화를 너무 자주 내는 사람에게는, “너의 분노로 인해 네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 않니? 화를 좀 줄이는 것이 어떻겠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 화를 열 번 내던 것을 아홉 번으로 줄이고 또 다음날 여덟 번으로 줄여나가는 것을 말씀에 순종한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고 버티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할 때는 마음에 평안이 있고, 불순종 할 때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잘 보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해 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라고 알려주실 것입니다. 같은 상황 속에서 감사 쪽을 택할 수도 있고 원망 쪽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감사를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택하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면 평안이 오고, 성령께서 뭐라 말씀하시든지 나는 내 감정대로 하겠다고 선택하면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됩니다.
가끔가다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든, 그 사람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고,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냐고 말입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내가 나서야겠다.”, “상처는 곪아터지기 전에 터트려야 된다.”, “은혜로 덮을 문제가 아니다.” 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정의의 이름을 걸고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얼굴을 보면 날이 서 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본성과 옛 습관을 거스르는 말씀일 경우가 많습니다. 순종하면 평안이 옵니다. 외면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