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지난주일 오후에 집에 왔다가 화요일 오후에 갔습니다. 손녀를 위하여 할머니가 당근을 통하여 준비해놓은 전자 올갠을 가져가기로 한 것과 맞물려 오게 된 것입니다.
손녀 볼 생각에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주일 오후에 교회당 사무실에 있는 동안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카톡 문자만 보게 되었습니다. 출발한다고 문자 왔으니 일정 시간이 되면 집으로 가는 길에 교회당에 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당 주차장에 차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는 하던 일 다 멈추고 달려가서 손녀를 안았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미소가 제 얼굴에 가득하는 것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안아서는 뽀뽀도 하고, 얼굴도 비비고, 손녀가 알아듣던 알아듣지 못하든 이런저런 말도 붙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다 표현하게 되고, 교회당에 있던 청소년 아이들에게도 다 보여주고 다녔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기에 얼릉 손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던 일을 정리하고, 집으로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저녁도 같은 식탁에 앉아서 먹고, 집 안에서 여기 저기 걸어 다니는 것도 보고, 음악이 나오면 춤추는 것도 보고,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말을 따라서 시키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기쁠까 싶을 정도 였습니다.
그렇게 손녀와 짧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기쁘지만 피곤함도 있습니다. 잠깐 놀아주는 것은 즐겁지만 계속 놀아주는 것은 피곤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것이었습니다. 육아의 수고가 대단함을 다시 느꼈습니다. 잠깐 보는 데도 힘든데 계속 보는 엄마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니 유아를 하고 있는 자매들과 며느리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둘째는 기쁘지만 희생도 뒤 따라야 합니다. 손녀와 함께 있어서 기쁘지만 손녀가 있음으로 감당해야할 희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집에서 내 할 일을 못합니다. 할아버지인 저도 그렇지만 할머니인 사모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손녀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일정 시간 지나면 거실에 있지도 못합니다. 손녀가 그곳에서 잠을 자야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의 여유였던 텔레비전 시청도 할 수 없습니다. 며느리가 손녀의 성장에 좋지 않다고 켜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책 보는 것은 일상의 모습 중에 하나인데 그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손녀 보느라고 집중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기쁘지만 불편도 각오해야 합니다. 손녀가 오는 즉시 집은 집이 아니라 손녀의 놀이터가 됩니다. 거실 바닥에는 손녀의 안전을 위하여 준비해 놓은 매트를 깔아야 합니다. 그리고 손녀가 거실에서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을 비치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는 기저귀 가방 등 손녀를 위한 물건이 어느새 사방에 널려 있게 됩니다. 쇼파에 앉아서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기쁨과 함께 정신이 멍해지면서 혼자 막 웃게 됩니다. “이게 뭔가‘ 하기 때문입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할머니도 같은 생각입니다. 기쁘지만 불편함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잠언 14장 4절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가 힘을 쓰면 소출이 많아진다.“손녀로 얻는 기쁨을 생각할 때 불편 정도는 얼마든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것과 연결시켜보았습니다. vip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가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쁘지만 피곤함도 각오해야 합니다. 기쁘지만 희생도 각오해야 합니다. 기쁘지만 불편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vip와 초보신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vip와 초보 신자들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서 어린아이를 벗어나게 되고, 장성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vip와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손녀가 오면 기쁘면서 피곤하고, 기쁘면서 희생도 해야 하고, 기쁘지만 불편도 각오해야 하지만 보내고 나면 또 보고 싶습니다. 또 집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손녀로 인하여 얻는 기쁨은 피곤함과 희생과 불편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vip와 초보신자들도 목자목녀나 목장 식구에게 그럴 것입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vip와 초보신자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