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가정교회사역원장 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옮깁니다.)
인간의 고통과 고난은 오랜 세월 철학자들이 씨름했던 주제이고 이 씨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고난은 잠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딜레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다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전지전능한데 인간을 고통 가운데 버려둔다면, 신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증명해 보여주시고, 이 딜레마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고, 언제인가 고난과 고통을 인간의 삶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잠정적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고통과 죽음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아직 고난으로 가득 찬 파괴된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감수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사단을 대상으로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어떤 때에는 고난만이 유일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입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요일 3:8).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있어라!”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없어져라!” 한 마디면 악마의 일을 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는 영적 싸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도 요한의 형인 야고보가 이런 싸움을 싸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에서도 예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세 명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신 모습도 다른 제자들은 못 보았지만 야고보는 보았습니다. 측근에서 모셨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 훈련을 받은 야고보가 사역도 제대로 못해보고 다른 사도들보다 먼저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자원의 낭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의미 없는 죽음을 허락하시고 낭비를 초래할 리가 없으십니다. 야고보는 고난의 극치인 죽음을 통해서만 가져올 수 있는 영적 싸움에 초청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하여 승리를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적 싸움에 참여하려면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지 말고 사명에 두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면 주님이 우리를 고난에 초청하실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목적을 사명에 두고 천국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살 때에만 고난의 초청에 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난과 행복이 상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한 고난의 끝에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이 좋아서 받아드리신 것은 아닙니다. 장차 있을 기쁨을 위하여 수치를 참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히12:2). 그렇다면,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을 선택했다면,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